정시에 퇴근하면 느끼는 묘한 불안감
모두가 남아 있을 때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업무는 마무리됐고, 시계는 퇴근 시간을 가리킵니다. 당당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히 느껴집니다. 눈치를 보며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상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조금만 더 도와주고 갈 걸 그랬나?" 이처럼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정상적인 퇴근’이 비정상처럼 느껴질까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오히려 예외처럼 여겨지는 직장 문화는 생각보다 깊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한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것’을 곧 ‘늦게까지 일하는 것’과 동일시해왔습니다. 그래서 빨리 일처리를 끝내고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덜 헌신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쉬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야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면적으로 방어적이 됩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그 마음 안에는 이미 충분한 부담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회사 문화와 ‘근면 신화’가 만든 집단 죄책감
‘열심히’에 중독된 사회
한국은 ‘열심히’라는 단어를 굉장히 미화하는 사회입니다. 근면, 성실, 인내와 같은 가치가 미덕으로 여겨졌고, 그 속에는 ‘자기 희생’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보다 오래 앉아 있었고, 누구보다 피곤해 보이는 사람이 더 신뢰를 받는 문화가 아직도 존재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시에 퇴근하는 것은 ‘충분히 힘들지 않은 사람’, 또는 ‘조직에 덜 헌신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기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야근을 감수하고, 그것을 견디는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 합니다.
동료 의식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압박
야근이 일상이 된 조직에서는 혼자서 퇴근하는 것이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업무가 끝났음에도 “다들 아직 있는데 내가 먼저 가도 될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도는 이유는, 회사 안에서 만들어진 동료 의식 때문입니다. 이런 동료 의식은 때로는 협력으로 이어지지만, 한편으로는 ‘같이 고생하자’는 비합리적인 연대감으로 작용합니다. 누군가 당연하게 퇴근할 때, 나머지 구성원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그것이 다시 ‘함께 야근해야 한다’는 암묵적 압력으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인 이 구조 속에서, 야근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됩니다.
야근 없는 삶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건강한 삶은 정시에 퇴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업무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진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남은 시간에는 자신의 삶을 누리려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은 자신의 컨디션을 관리하고, 다음 날 더 나은 집중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회사에 더 이익이 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삶은 단지 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저녁을 먹고, 친구와 한 잔의 커피를 나누며, 운동을 하거나 취미를 즐기는 그 모든 시간이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합니다. 이 모든 시간을 ‘야근’이라는 이유로 희생한다면, 결국 남는 건 만성 피로와 무기력뿐입니다. 더 이상 건강한 퇴근을 ‘이기심’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죄책감보다 필요한 것은 ‘일의 경계선’
업무와 삶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선택입니다. 퇴근 이후에도 업무 관련 메시지를 확인하고, 메신저 알림에 즉각 반응해야 하는 문화는 결국 일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정해진 시간 외에는 ‘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동료와의 관계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안해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퇴근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조직은 건강해지고, 구성원 간의 존중과 신뢰도 자라날 수 있습니다. 죄책감이 아닌 자부심으로 퇴근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근 없는 죄책감'이 아닌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
새로운 세대가 바꾸는 퇴근의 기준
MZ세대를 중심으로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처럼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 삶'보다, '회사와 함께 성장하되 내 삶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선택합니다. 정시에 퇴근하고, 연차를 자유롭게 쓰며, 일 외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에게 투자합니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직장 문화는 비효율적인 야근 문화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조직이 야근 없는 문화를 지향하며 유연근무제, 재택근무, 주 4일제 등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과보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무엇을 해냈는가’에 더 집중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효율적으로 일하고 삶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야근=성실함’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개인의 인식 변화입니다. 우리는 일하는 시간만큼, 쉬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쉬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조직의 제도와 문화가 달라져야 합니다.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주지 않는 분위기, ‘남아서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퇴근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일찍 가네?”가 아닌, “오늘도 수고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짜 변화는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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