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멈췄지만, 머릿속은 계속 일하고 있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상사의 압박, 잦은 야근과 주말 업무가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조이듯 답답했고, 평범한 보고 하나를 앞두고도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막연한 공포감이 먼저 찾아왔다. 약물 치료와 상담을 병행했지만,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인 '일'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던 중, 우연히 접한 개념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였다. 처음엔 그저 반항적인 태도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용한 퇴사'라는 선택, 그리고 생존의 시작
나는 어느 날부터 ‘필수 업무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야근을 거절하고, 불필요한 회의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상사의 메신저에 즉각 반응하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업무 앱을 껐다. 물론 처음엔 걱정이 컸다. 눈에 띄게 태도가 달라진 나를 조직이 어떻게 볼지, 인사 평가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두려웠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조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선을 긋고 감정을 절제하자 업무 관계는 더 건조하고 깔끔해졌고, 감정 소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조용한 퇴사는 나에게 일종의 ‘심리적 경계 설정’이었고, 그것은 불안을 줄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 되었다.
왜 조용한 퇴사가 불안장애에 도움이 되었는가?
정신건강의학에서는 과도한 외부 자극과 통제감의 상실을 불안장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본다. 내가 겪었던 불안도 마찬가지였다. 업무는 끊임없이 변했고, 나는 항상 그 변화에 반응하며 살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림, 실시간 보고 요청, 뚜렷하지 않은 기대치. 그런 요소들이 내 자율성을 갉아먹었고, 결국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만성 긴장 상태로 이어졌다. 조용한 퇴사는 그 흐름을 끊는 계기가 됐다. 스스로 설정한 ‘업무 시간의 울타리’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 ‘통제감 회복’은 정신의학적으로도 회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더불어, 감정 노동을 줄이고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며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한 것이 불안 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용한 퇴사는 퇴보가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조용한 퇴사를 선택한 이후, 나는 병세가 호전됐고, 약물 복용량도 줄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조직의 구조상 불가능할 수도 있고, 성과 압박이 너무 강한 환경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조용한 퇴사가 단순한 ‘게으름’이나 ‘회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정서적 기술이자 생존 전략이다. 조직 역시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구성원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건강한 구성원이 있는 곳에 지속 가능한 조직이 존재한다. ‘적당히 일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은 곧 ‘건강하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조용한 퇴사는 나에게 다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용한 퇴사의 정신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기 위한 조용한 퇴사 심리학 (0) | 2025.07.21 |
---|---|
‘일에 덜 미치는 삶’이 주는 평온: 정신건강학자가 말하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0) | 2025.07.20 |
업무 시간만 일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조용한 퇴사와 번아웃의 경계에서 (0) | 2025.07.20 |
조용한 퇴사를 선택한 2030 직장인 5인의 인터뷰-그들의 불안과 회복 이야기 (0) | 2025.07.19 |
조용한 퇴사는 회피일까, 생존전략일까? 정신건강 관점에서 해석하기 (0) | 2025.07.18 |